영등포는 늘 멀었다.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광화문, 종로, 성북과 같은 사대문 안의 서울 진골 사람들이 볼 때 그곳은 분명 변방의 지역이었다.
한강을 건너야 영등포를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서울사람들이 멀리서 본 영등포는 ‘아련한 불빛’뿐이었다. 중간의 여의도 비행장도 쓸쓸한 불빛만이 보였다.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탓일까.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 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러워라…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 하나….’
아련한 불빛이라면 그것은 밤이었다. 영등포의 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 영등포는 밤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나의 밤은 너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식의 ‘밤의 송가’를 불러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밤이 아니었다.
정감이 짙고 한(恨)이 질기면 밤이 깊다고 했던가. 편히 잠들어 밤이 깊은 것이 아니라 도무지 쉬 잠이 못 들어 깊은 밤인 것이다.
서울에서 밤이 깊기로 따지면 과연 영등포를 제칠 곳이 있을까. 종로의 밤, 명동의 밤, 신사동의 밤은 도회지 쾌락과 낭만을 은유하는 중산층의 밤이었지만 ‘영등포의 밤’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면적이 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던, 하지만 대부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로 고통의 일상을 토해냈던 민초들의 지역. 해방 이후 살길이 너무도 막막해 희망을 찾아 이농하여 서울로 향한 많은 지방출신 사람들은 연고가 없어 용산역에, 서울역에 내리지 못하고 영등포에 진을 쳤다고 한다.
그들 다수가 요즘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삶의 행보를 시작했다. 한숨과 하소연으로 뒤덮인 하루 하루였기에 그들의 쉼 시간인 밤도 서러웠다. 당연히 그 밤은 깊었다.
1950~60년대 영등포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영등포의 밤이라는 어휘는 슬쩍 미소 짓게 하는 추억의 파편이 아니라, 당시 고된 삶을 에두른 역경이 떠올라 가슴을 울리는 기억의 덩어리로 다가온다.
‘고난의 추억’이다. 그 무렵 영등포의 삶을 경험한 어느 할머니의 술회는 절절하다.
“그때는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와 영등포로든 문래동이든 늘 땅이 젖어있었지. 그래서 영등포가 아니라 ‘진등포’라고들 했어. 늘 장화를 신고 다녔으니까.
하긴 장화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야. 사는 게 그렇게 고단할 수가 없었지. 하루가 괴로웠지, 밤이 무서웠어.”
영등포를, 그 밤을 대중가요의 주요한 진지(陣地)로 만든 노래는 말할 것도 없이 1966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이다. 표면적으로는 타 지역의 밤 노래처럼 이 노래도 사랑가(歌)의 언저리에 있다.
지극히 통속적인, 떠난 사랑에 대한 회한이다. 하지만 여기에 영등포인들은 사랑만이 아닌 힘든 삶에 대한 그들만의 감정을 이입했다.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오는 사랑의 물결/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가슴을 파고 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 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어릴 적 몰래 훔쳐본 영등포 2가의 한 술집에서 누군가 선창하자 술집의 모든 손님들이 목이 터져라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하고 따라 외치던 순간이 기억난다.
이 끝 대목에서 어른들은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고단한 민초의 삶을 토로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끝내 그 생활을 이겨내리라는 비장한 의지도 거기에 실었던 것이다.
한낮 사랑노래에 고통과 비전이라는 진한 리얼리즘을 이중주로 얹혔으니 완벽한 대중가요로의 비상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남궁원·엄앵란이 주연한 같은 제목의 1966년 영화(감독 강민호)에 삽입된 주제가였고, 노래를 부른 가수 오기택도 영화에 특별출연해 많은 화제를 남긴 곡이기도 했다.
영화 때문에라도 이 곡이 현재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에게 남긴 흔적은 컸다. ‘고향무정’ ‘사나이 길’, 그리고 가수 비가 나온 광고로 인해 신세대에게도 인지된 ‘아빠의 청춘’이 당대의 저음 가수 오기택과 연관되는 노래들이지만, 적어도 영등포인들은 오기택 레퍼토리로 무조건 ‘영등포의 밤’을 찜했다.
1970년대 들어 가요규제조치와 함께 왜색이라는 이유로 이 곡에 대해 방송 및 판매 금지를 시킨 것은 오히려 이 노래에 대한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등포 사람들은 자유구역인 주점에 모일 때마다 의도적으로 ‘영등포의 밤’을 노래해 복권(復權)을 미리 당겨 즐겼다. 노래는 1987년에 와서야 해금됐다.
이제 ‘영등포의 밤’은 거의 불리지 않는다. 영등포의 밤이 다른 곳의 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당산철교가 한동안 공사로 끊기면서 부천, 인천의 젊은이들이 신촌 홍대로 넘어가지 않고 영등포에 멈춰 서면서,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청춘의 유흥가마저 영등포 곳곳에 번성했다. 영등포역 일대의 백화점들은 달라진 지역 이미지를 웅변한다.
배일호의 ‘신토불이’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압구정 강남거리 여기는 어디냐/ 순이는 어디 가고 미스리만 있느냐… 영등포 명동거리 여기는 어디냐/ 순이는 어디 가고 미스김만 있느냐/ 지하층에 마네킹이 외제품에 춤을 추네….’
세월이 흐르면서 영등포도 서서히 민초적 전통과 결별하면서 명동이나 강남거리와 서구화의 눈높이를 맞춰버렸다. 주먹 쥐고 울분을 토하듯 ‘영등포의 밤’을 부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변방에 위치해 서민정서의 ‘특구’였던 곳이 갖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불빛이 아련하기는커녕 어느 곳보다 휘황찬란하다. ‘영등포의 밤’이 뿌린 추억의 여운은 ‘불야성 영등포’의 쾌락적 유흥에 자리를 내주었다.
왜 과거의 영등포를 가난하게만 기억하느냐, 슬픈 배타적 국지성만을 강조하느냐는 반론이 이쯤에서 나올 만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영등포가 예로부터 대형지역의 위풍을 자랑했다고 주장한다. 실은 구로동, 목동, 화곡동 등 서울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전반의 지역이 전에는 영등포였다.
이리저리 다양하게 ‘떼어준’ 것으로 판단하면 분명히 과거에 영등포는 ‘발칸화(化)’를 이룩했다. 한때 별개의 도시로 독립할 것이라는 낭설이 나돌았던 것도 그 때문 아니었을까.
그 강건함은 오늘날의 ‘영동’이 영등포의 동쪽에 위치해 붙은 이름이라는 사실이 말해준다. 서울을 대별하는 잣대가 영등포였던 셈이었다.
굳이 어렵고 눈물을 짜내던 시절만을 들추어내는 것은 짓궂다. ‘마포종점’ ‘영등포의 밤’에 그려진 아래의 층위(層位)를 호감으로 받아들일 현재의 영등포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가요 측면에서 그것은 하등 불리할 게 없다.
아직도 비리고 궂은 이미지가 스멀거리기에 무차별 도시화의 굴착에도 영등포는 특별나고 아름답다. 대중가요는 이상하게도 그런 어둠의 정서를 편애하며 원기를 보충한다.
‘이젠 그만 나를 놔줘 영등포. 나는 너무 지쳐버렸어.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지친 나는 무너져 내려. 이젠 나를 떠나가 줘 영등포. 난 충분히 힘들어했어. 변명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렸어. 너의 바닥에 붙은 까만 껌처럼 넌 내 맘 한구석에 단단히 붙어, 그 묘하고 슬픈 노래와 얘기들을 내 꿈속에 가득 풀어놓지….’
소설의 한 대목도, 고백의 시도 아니다. 이장혁이라는 이름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지난해 발표한 곡의 노랫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