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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보

호소력 넘치는 곡 ‘물음표만 남기고’로 인기몰이


비오는 밤 아무 설명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사랑하는 여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외로운 모습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린 노래가 등장했다. 

가수 홍준보가 불러 전국의 노래교실을 중심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물음표만 남기고’(김병걸 작사 김영호 작곡)가 바로 문제의 곡이다. 


홍준보의 묵직한 목소리와 호소력 넘치는 창법이 이 노래의 매력. 

파워풀하면서도 애절한 창법으로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면서 저절로 따라 부르게 만드는 묘한 곡이다. 

  홍준보는 지난 2014년 세미 트로트 ‘산소같은 여자야’를 발표하며 데뷔한 가수. 

작곡가 안치행 선생에게 1년간 확실한 발성법과 창법 등을 배우고 난 다음 데뷔를 준비하면서 제작자의 제안으로 본명 김재우 대신 홍준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수로 활동하며 살이 빠져 달라지긴 했지만 데뷔하기 전에는 얼굴이 지금보다 통통해 홍콩 배우 홍금보를 많이 연상시키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었지만 반복해 사용하면서 이젠 아주 적절하고 자연스런 이름이 되었다고 본인은 설명했다. 간혹 이름이 비슷한 모 정당의 대표였던 분과는 어떤 사이냐고 농담조로 묻는 팬들도 있긴 하지만….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홍준보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와 노래를 좋아했다. 

유복한 집안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중학에서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활동했다. 


   약도 없는 가수병을 앓던 외아들 그러나 3학년 때 어깨 회전근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고 야구를 포기해야 했다. 

협성고교에 진학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가요로 바뀌면서 김경호의 록발라드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등을 부르면서 남몰래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계명대 국제학부를 졸업한 그는 모 제약회사에 취업해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도 각종 가요제에 나갈 궁리만 했다.

전국의 유명한 가요제는 모두 출전했다는 그는 김천에서 열린 KBS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진성의 ‘내가 바보야’를 불러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노래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면서 경고를 하시곤 했다. 

그는 이 무렵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개설한 제2기 야구심판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고 아마추어 야구대회의 심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좋아하던 야구의 심판이 되어 기쁘긴 했지만 곧 어려움을 깨달아야 했다. 

키가 작은 편이어서 대부분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올려다보면서 판정을 하자니 도무지 심판의 권위가 서는 것 같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노래로 가자는 어려운 결심을 하고 통신병으로 근무하던 군 복무시절 가깝게 지내던 선임병의 소개로 뵙게 된 작곡가 안치행 선생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가사의 정확한 전달을 강조하는 그 분의 지도 아래 정확한 발성법과 복식호흡법을 확실하게 익혔다. 

가수로 데뷔할 때까지도 가수 활동을 반대하던 그의 부모님은 ‘물음표만 남기고’를 발표하기 직전 그의 가수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로 방침을 바꾸셨다고 한다. 

2018년 2월 KBS1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에 함께 출연한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약사라면서 “세상 모든 병에는 치료할 약이 있는데 약도 없는 병은 가수병 뿐입니다”라고 말해 시청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출처] 홍금보? 홍준표? 아니고 홍준보!|작성자 케이아이

곡명 아티스트 앨범 듣기 뮤비 가사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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