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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가수 오기택 중풍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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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
작성일15-07-08 13:58 조회194,4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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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면 신곡 취입하겠다”며 의욕

 

 원로가수 오기택(76)이 지난 2013년 11월 16일 서울 연희동 소재 중풍전문 한방병원인 동서한방병원(병원장 박상동)에 처음 입원한 이후 무려 20개월간 무료로 중풍 치료를 받으며 건강도 크게 호전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중풍치료의 권위자로 유명한 제민의료재단 이사장 겸 동서의료원 원장인 박상동 박사는 특히 폐렴까지 겹쳤지만 치료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오기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아무 조건 없이 중풍을 치료해 줄 것이니 입원하라고 권유한 이후 지금까지 수 천만 원에 이르는 거액의 병원비를 한 번도 받지 않고 무료로 치료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박상동 병원장, 수천만 원 치료비 받지 않고 진료

지난 1997년 정초 추자도 인근 무인도 염섬에서 홀로 낚시를 하다가 왼쪽 다리와 왼쪽 팔이 마비되는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한 때 건강을 되찾기도 했으나 2008년경부터 중풍이 악화되며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또 2013년 8월 중순에는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2개월간 입원해 치료를 받으며 가까스로 폐렴을 극복했지만 5백여 만원의 치료비도 없어서 막막한 실정이었다. 이 때 한 60대의 여성 팬이 나타나 입원비 전액을 지불해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2년부터 오기택의 병수발을 해온 요양보호사 권남희씨에 따르면 그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퇴원한 이후에도 강동재활요양병원, 북부시립병원 등 여러 병원들을 전전하며 중풍 치료를 받으려 했으나 병원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무렵 아무 조건 없이 입원해 치료를 받으라는 동서한방병원 박 원장의 전화가 왔으나 자존심이 강한 그가 치료비도 내지 않고 입원할 수는 없다며 거부하다가 권씨의 1주일에 걸친 설득 끝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

매월 20만원 보내주는 박상철 등 선후배 동료 가수들의 온정도 줄이어

1960년대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 ‘아빠의 청춘’ 등을 노래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매혹의 저음가수로 유명한 오기택이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2013년 6월. 한 매체에 이 사실이 보도된 데 이어 방송과 신문들이 뒤따라 보도하자 선후배 동료 가수들의 도움도 끊이지 않았다. 그의 후배가수 박상철은 지난 2011년부터 매월 20만원씩 송금해 오고 있으며 이후 모델 출신 가수 홍원빈도 매월 30만원씩 송금해 온다고 한다. 이들 두 가수는 동서한방병원으로 두 번씩 문병을 오기도 했다. 또 이동기 가수노조 위원장과 이환호 부위원장 등은 발산동서 1일 찻집을 해 성금 3천만 원을 마련해 오기택을 비롯해 한명숙 명국환 등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원로 가수들에게 각각 1천만 원씩 전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의 대선배인 코미디언 송해를 비롯해 김상희 박일남 최백호 태진아 오승근 김흥국 권성희 현숙 등이 문병을 와 오 선생이 눈물을 흘렸다.

의협심에 불타던 가요계의 이단아 오기택

 오기택은 지난 1962년 데뷔곡 ‘영등포의 밤’(김부해 작사 작곡)을 히트시키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이후 타고난 가창력과 매혹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곡마다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는 등 당대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골프 등 스포츠를 유달리 좋아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의협심을 발휘하는 등 호탕한 성격 탓에 방송가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는 등 ‘가요계의 이단아’ 또는 ‘가요계의 돈키호테’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평생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며 가수 활동에 전념하지 않은 탓에 20여 년에 걸친 투병 생활로 벌어놓은 돈을 모두 치료비로 탕진했다. 지난 1997년 뇌출혈로 쓰러져 극적으로 구조된 이후 제주도를 거쳐 서울로 후송돼 뇌수술을 받으며 고비를 넘겼으나 당시 마비됐던 왼쪽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10여 년 간 목발을 짚고 다니며 무대에도 오르는 등 재활에 매달렸으나 7년 전 갑자기 증세가 악화돼 홀로 일어서서 걷지 못하게 되고 급기야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외출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에 몸 전체가 약해져 가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노래까지 제대로 부를 수 없으니 수입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수 활동에 전념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방송 출연을 등한시했고 급기야는 방송사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자신의 노래가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 그런데도 방송사들과 타협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스포츠만 즐기는 바람에 가수로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설명이다. 오기택은 1939년 4월 2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월성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론 1943년생이지만 실제 태어난 건 1939년이다. 부친은 그가 세 살 때 돌아 가셨다고 한다. 그는 북일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살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상경해 서울 성동기계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62년 ‘영등포의 밤’ 히트시키며 하루아침에 스타덤

 그는 고교 졸업 후 회현동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에 있던 동화예술학원에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고 고복수 선생이 운영하던 학원이었는데 1961년 동화백화점 대표로 KBS TV가 주최한 제1회 직장인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다. 당시 TV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본 작곡가 김부해가 그를 찾았다. 충무로에 있던 가요작가동지회 사무실을 찾아가 오디션을 받았다. 김부해 선생의 피아노 반주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러 노래를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후 ‘영등포의 밤’, ‘가버린 영아’, ‘키스 키스 키스’ 등 모두 김부해 선생이 직접 작곡한 곡들을 받아 몇 달 동안 연습을 하고 신세기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당시 초봉은 월 5천원. 1962년 12월 ‘영등포의 밤’이 담긴 데뷔 음반이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나오자마자 히트를 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기세를 꺾을 정도로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당시 신세기레코드사는 부도로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영등포의 밤’이 담긴 레코드가 밤새 찍어도 모자랄 정도로 잘 팔려 회사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영등포의 밤’은 나중에 엄앵란과 남궁원이 주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창법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와 함께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다시 해금되었다. 5년 전에는 영등포구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영등포의 밤’ 시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는 1963년 4월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다. 진해에서 훈련을 받고 서울 한남동 군예대에서 근무했다. 65년 가을 만기 제대할 때까지 전국을 돌며 군부대 위문공연과 새마을 위문공연에 참가하고 다녔으니 가수활동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파월 병사 위문공연에도 두 번이나 참가했다. 그가 해병대를 제대한 다음 해인 1966년 ‘고향무정’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함께 취입한 ‘충청도 아줌마’와 함께 작곡가 서영은 선생의 곡이었다. ‘고향무정’의 반응은 ‘영등포의 밤’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하면 ‘고향무정’이 나왔고 전파사와 레코드가게 등 서울 시내 가는 곳마다 그 노래가 나왔다.

전성기 때 방송에서 노름꾼으로 몰리자 담당 PD와 멱살잡이 후 활동중단

고향무정’이 히트할 무렵 그는 볼링에 미쳐 있었다.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배우 신영균이 운영하던 명동 신스볼링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느라 ‘고향무정’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 중이었는데도 방송 출연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볼링을 하러 워커힐호텔에도 자주 다녔다. 하루는 MBC 라디오 ‘정오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서 ‘고향무정’을 튼 다음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오기택이 노름에 미쳐 워커힐 카지노에서 산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바람에 난리가 났다. 혈기왕성한 오기택은 즉시 MBC 담당 PD 정모씨에게 달려가 멱살잡이를 하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말았다. 이후 MBC는 물론이고 서울의 모든 방송국들이 오기택의 노래는 전혀 틀지 않았다. 젊은 가수가 겁도 없이 나이 든 방송PD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니 괘씸스럽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운 가수라 할지라도 멀쩡한 사람을 노름꾼으로 몬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기택은 그 때부터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몇 달 동안 머물며 골프를 배우기도 했다. 그는 일본에 가서도 방송국이 왜 그랬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보니 가수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방송국에 아부하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바치고 있으니 방송국 사람들이 가수들을 깔보고 거짓말 방송까지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담합까지 해가며 그 가수의 노래를 방송하지 않은 것이다. KBS 덕택에 가수가 되었는데 가수활동을 그만둔 건 MBC 덕택이 된 셈이다. 가수 혼자서 방송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고향무정’의 작곡가 서영은 선생이 그를 다독이며 방송사와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의 방송활동은 중단되었지만 ‘충청도 아줌마’, ‘마도로스 박’, ‘아빠의 청춘’ 등 히트곡은 계속 나왔다. 서울에서만 방송활동을 중단했을 뿐 지방 방송국들은 계속 그의 노래들을 틀었기 때문이다. 또 ‘마도로스 박’과 ‘아빠의 청춘’은 영화 주제가였기 때문에 방송활동을 않고도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가수분과위원장 된 이후 출연료 인상 요구하며 또 방송사와 전쟁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방송 출연을 중단했을 뿐 취입은 계속했다. 한 달에 무려 20곡씩 몇 년 동안 계속 취입한 일도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악단과 가수가 동시 녹음을 했으니 40여 명 중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녹음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취입곡은 1천곡을 넘는다. 나중에는 길을 가다가 낯선 노래가 나오는데 목소리가 익숙해 자세히 들어보고서야 자신이 부른 노래라는 걸 깨달은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1979년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다시 한 번 MBC와 결전을 치렀다. 그 때까지 가수들의 출연료 등급이 6등급이었는데 경력에 따라 AB/C의 3등급으로 줄이고 특A 등급을 신설했다. 출연료 인상률이 무려 150%였다. 목표를 관철시키려 가수들의 방송 출연을 모두 중단시키는 등 고집을 부리며 싸워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하도 빡세게 나오니 KBS TBC MBC 방송 3사는 이듬해 출연료 조정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MBC 임택근 아나운서가 조정위원장을 맡아 먼저 50% 인상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때 방송사들 특히 MBC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이후 오기택은 MBC에선 아예 금지가수가 되고 말았다. MBC와는 정말 인연이 닿지 않았다.

  “병마 이기고 작곡가 김희갑 선생님 신곡 받아 취입하겠다!”

 오기택은 일본에서 골프를 처음 접한 이후 골프의 매력에 빠져 숱한 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다. 심지어는 69회부터 71회까지 전국체전에 전남 대표로 계속 나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등 메달을 4개나 받기도 했다. 골프를 잘하니 프로 골퍼로 데뷔하라는 권유를 수없이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결혼을 못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고 했다. 살다보니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애도 길러 보고, 속도 상하면서 가정을 이끄는 게 행복인데 사람으로서 도리를 못하면서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다친 다음에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동서한방병원에 입원한 이후 폐렴에 걸리기 이전보다 몸이 훨씬 좋아졌다는 그는 선배가수 손인호 선생처럼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방송에 나가 노래를 부르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지난 3월 KBS <가요무대>에 박상동 동서한방병원장과 함께 출연해 김동건 아나운서와 인터뷰도 하고 후배가수 현숙과 함께 노래도 했지만 제대로 된 노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오는 8월 퇴원하면 작곡가 김희갑 선생의 신곡을 받아 취입을 하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위 사진은 지난 4년 동안 오기택의 건강관리를 해온 요양보호사 권남희씨(왼쪽)와 오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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