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찾아온 ‘가을의 연인’ 패티 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5-05-27 11:35 조회107,184회 댓글0건
관련링크
본문
45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가수로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패티 김. 그가 5월 7∼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미자, 조영남과 함께 ‘Big 3 콘서트’를 갖는다. 얼마 전 손주를 봐 드디어 할머니가 됐다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미모를 과시한다.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패티 김의 평범한 일상과 음악에 대한 열정.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찍고…
‘빅 3’ 가운데 넘버원! 전국을 돌다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 패티 김(65). 무대를 압도하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자존심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스타는 아름다워야 한다며 절식을 생활화하고 있는 패티.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자부심이 그를 늙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베레모에 자주색 스카프… 외모에서부터 활기가 넘친다. 예순다섯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날도 그는 이국적인 차림에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959년 가요계에 데뷔한 패티 김은 ‘9월의 사랑’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연인의 길’ ‘서울의 찬가’ ‘가시나무새’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45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가수로 활동해왔다.
가을 노래가 유난히 많은데다 매년 가을이면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열어 ‘가을의 연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녀. 그런데 이번엔 웬일인지 햇살 가득한 봄, 5월에 팬들 곁을 찾는다.
이름하여 ‘Big 3’ 콘서트. 봄에 만날 패티 김은 혼자가 아니다. 콘서트명 그대로 한국 가요계 거목 3인방이 한 무대에 선다. 패티 김, 이미자(64), 조영남(60). 이만한 빅 3도 없겠다 싶다. 이름만 들어도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30년, 많게는 40년 이상 가요계 정상을 지켜온 이들이다. 가요계 이슈 중의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네요. KBS 창사기념 특집 ‘빅 3’ 합동 공연에서 우리 세 사람이 한 무대에 섰죠. 그런데 그때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언제 한번 세 사람이 함께 콘서트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도 그때 받았구요. 저희 세 사람 모두 대중의 사랑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크고 깊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한 무대예요.”
‘빅 3 콘서트’는 5월 7~8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오는 7월 9일까지 전국 12개 도시를 순회한다. 개성 뚜렷한 세 사람은 사랑, 여유, 우정을 주제로 자신의 히트곡뿐 아니라 다양한 팝송과 가요를 부를 예정이다.
그런데 패티 김, 이미자, 조영남. 겉모습만 봐선 위아래가 다소 헷갈린다. 알고 보니 뜻밖에 최고 연장자는 패티 김. 나이는 패티 김이 위지만 이미자와는 1959년 같은 해 데뷔, 올해로 가수 인생 46년을 맞는 가요계 입문 동기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래된 현역도 흔치 않을 정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이미자), ‘초우’ ‘못 잊어’(패티 김)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두 사람은 각각 전통적 감성과 도회적 감성을 대표하는 한국 가요사의 대스타다. 올해가 환갑인 조영남은 데뷔 37년을 맞는다.
‘빅 3 콘서트’ 제작발표회가 있던 날, 청일점 조영남은 “이렇게 거국적으로 제 환갑잔치가 열린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힘들고 어렵게 다시 뭉친 세 사람. 패티 김은 세 사람의 조우에 대해 “우리 세 사람의 각기 다른 개성을 뚜렷하게 나타내면서 함께 무대에 오를 때는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의 공연을 준비중”이라고 귀뜀했다.
예순다섯에 안아본 첫 손주
대형 가수 아닌 여자 패티 김은 따뜻한 여자
도도하다는 소문과 달리 직접 만난 패티 김은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따금 얼굴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10대 소녀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패티 김은 도도하다.
가수로서 무대에 설 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이런 도도함은 음악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문득 대형 가수가 아닌 두 딸의 어머니, 아내로서 그녀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패티 김은 딸들에게 친구 같은 엄마, 남편에게는 애인 같은 아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맏딸 정아씨는 유엔 홍보 직원. 오랜 기간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등 분쟁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벌여 늘 어머니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던 큰딸은 3년 전 미국 워싱턴 DC로 근무지를 옮겼다.
둘째 딸 카밀라도 1집 활동을 접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 이탈리아에서 사업을 하던 남편 게디니는 현업에서 물러나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다. 온 가족이 뿔뿔이 떨어져 살다 보면 외롭기도 하겠다.
“요즘은 남편과 1년에 다섯 번 정도 볼까요? 각자의 생활을 즐기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요, 30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잖아요.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우리 인생도 좀 즐겨야죠. 그리고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 만나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아요. 이 나이에 다시 연애하는 기분이죠. 전에는 제가 공연차 집을 비울 땐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집에 있을 때는 여느 엄마, 아내 못지않게 착실한 주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요. 최선을 다해 가정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는 제 음악 생활에 더 욕심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요.”
가족 얘기를 이어가던 패티 김은 “올 초 식구가 하나 늘었다”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정아씨가 아들을 낳아 어머니 패티 김에게 손주를 안긴 것.
“딸이 너무 대견스럽고 또 기뻤어요. 손주 이름이 킴인데 얼마나 예쁜지 말도 못해요. 자주 못 보는 게 안타깝죠. 태어났을 때 보고 못 봤는데 5월에 다시 봐요. 워싱턴 DC에서 조영남씨와 함께 공연이 있거든요. 손주 볼 생각에 5월이 더욱 기다려지네요.”
조용히 인터뷰에 응하던 패티김은 “이 자리를 빌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일각에선 내가 외국에서 생활하다 공연이 있을 때만 한국을 찾는다는 얘기들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는 정말 사실과 다릅니다. 서울올림픽이 있던 지난 88년부터 저 한국에서 쭉 살았거든요. 카밀라 학교도 다 한국서 보냈구요. 제가 TV 출연도 뜸하고 공연도 간간이 해서 이 같은 소문이 나는 것 같은데요. 저 미국 영주권도 갖고 있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미국서 나고 자란 큰딸 정아가 혹 한국말을 잊을까 일부러 한국서 중학교를 다니게 한 패티 김이다. 그 노력 덕에 정아씨는 외국에 살면서도 한국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패티 김은 “연예인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10분이면 다 퍼지지만, 진위가 밝혀지는 데는 10년도 넘게 걸리는 것 같다”며 오해를 풀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성계와 연 맺은 지 어느덧 5년
후원회장 직 맡으며 가장 보람된 일은 ‘호주제 폐지’
패티 김은 회갑이 지난 나이에도 철저한 체력 관리로 젊은이들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매일 4~5km씩 걷기 운동을 하고, 틈날 때마다 수영을 즐긴다. 평생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절식을 하기로도 유명하다.
“건강 관리는 하루 이틀 해온 것이 아니에요. 평생 저 자신과 전쟁을 치러왔다고 할 수 있죠. 음식 조절하고 운동도 하루에 두 시간씩 꼬박꼬박 합니다. 가수 데뷔한 후로 배부르게 먹은 적이 별로 없어요. 항상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 정도만 먹어요.”
보톡스 주사라도 맞은 걸까? 몸매야 절식과 운동으로 조절이 가능하다지만 주름이 거의 없고 탄력 넘치는 피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톡스 주사가 뭐예요?(웃음) 전 피부 관리를 특별히 안 하는 편이에요. 좋은 피부를 타고났다 할까요? 피부에 관한 한 부모님께 감사해야 해요.”
패티 김은 체력 관리 못지않게 목소리 관리에도 신경을 쓴다. 공연 전에는 탄산음료를 비롯, 맵거나 짠 음식은 되도록 삼간다. 평상시 말을 아끼는 것 또한 목소리 관리의 일환이란다.
철두철미한 관리녀. 그녀는 어쩌면 스타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패티 김은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빅 3 콘서트’ 제작발표회 현장에서도 조영남은 세 사람 중 예전과 비교해 가장 많이 변한 사람으로 패티 김을 꼽으며 “굉장히 순해지셨다”고 말한 바 있다.
“예전엔 인상이 강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타고난 성격도 있었겠지만 스타 의식도 전혀 없었다곤 할 수 없죠. 스타는 항상 뭔가 베일에 싸인 존재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자기 관리 하난 정말 잘해왔다 자부했구요. 그런데 50이 넘으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양보하고, 겸손해지고, 또 부드러워졌죠.”
2001년 6월부터 패티 김은 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직을 맡고 있다. 여성단체 활동에 발벗고 나선 이후 뉴스를 볼 때도 호주제 폐지와 매매춘 문제가 나오면 한번 더 눈길이 가더라는 패티 김. 가수로서만 철저하게 자기 관리해온 그에게 여성단체 후원회장이란 이름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50대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맡아달라는 자리가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그런데 2001년 봄 여성단체연합에서 운영이 상당히 어렵다는 말과 함께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는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수락했는데 이렇게 보람이 클지 몰랐어요. 여성단체에서 오랫동안 노력하고 애써온 호주제 폐지도 성사됐잖아요? 제가 그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다는 생각을 하면 뿌듯해요.”
패티 김은 후원회장을 맡은 뒤 여러 차례 여성단체연합 후원금 마련을 위한 순회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상당한 액수의 수익금은 여성단체연합에 맡겼고, 운영에 큰 힘이 됐다. 그는 “무엇보다 내 공연을 통해 여성단체연합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혼에 이은 재혼, 아버지가 다른 두 딸을 키운 경험이 그로 하여금 특히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패티 김은 작곡가 고 길옥윤씨와 이혼 후 76년 이탈리아인 아르만도 게디니와 재혼해 둘째 딸 카밀라를 낳았다. 첫째 정아씨는 고 길옥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실 패티 김의 두 딸은 모두 외국 시민이기 때문에 호주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한국 국적을 가졌다면 두 딸의 성이 달라 자라나면서 엄청난 혼란을 겪었을 게 뻔하다. 그녀는 자기 개인적인 상황을 떠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호주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뒤늦게 여성계에 뛰어들었지만 그의 바람은 역시 ‘노래 잘하는 가수’로 남는 것이다. 그녀가 세운 또다른 인생 목표는 50주년 기념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는 것. 포부 역시 패티 김답게 당차고 또 도도하다.
“40주년 기념 공연도 무사히 치러냈으니 이제 50주년을 향해 달려가야죠. 그때가 되면 제 나이 일흔이에요. 하지만 자신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라도 무대에 설 수 없는 목소리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퇴할 겁니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지호영
두 딸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패티 김의 평범한 일상과 음악에 대한 열정.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찍고…
‘빅 3’ 가운데 넘버원! 전국을 돌다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 패티 김(65). 무대를 압도하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스타로서의 자존심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스타는 아름다워야 한다며 절식을 생활화하고 있는 패티.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자부심이 그를 늙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베레모에 자주색 스카프… 외모에서부터 활기가 넘친다. 예순다섯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날도 그는 이국적인 차림에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959년 가요계에 데뷔한 패티 김은 ‘9월의 사랑’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연인의 길’ ‘서울의 찬가’ ‘가시나무새’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45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가수로 활동해왔다.
가을 노래가 유난히 많은데다 매년 가을이면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열어 ‘가을의 연인’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녀. 그런데 이번엔 웬일인지 햇살 가득한 봄, 5월에 팬들 곁을 찾는다.
이름하여 ‘Big 3’ 콘서트. 봄에 만날 패티 김은 혼자가 아니다. 콘서트명 그대로 한국 가요계 거목 3인방이 한 무대에 선다. 패티 김, 이미자(64), 조영남(60). 이만한 빅 3도 없겠다 싶다. 이름만 들어도 육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30년, 많게는 40년 이상 가요계 정상을 지켜온 이들이다. 가요계 이슈 중의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네요. KBS 창사기념 특집 ‘빅 3’ 합동 공연에서 우리 세 사람이 한 무대에 섰죠. 그런데 그때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언제 한번 세 사람이 함께 콘서트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도 그때 받았구요. 저희 세 사람 모두 대중의 사랑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크고 깊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한 무대예요.”
‘빅 3 콘서트’는 5월 7~8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오는 7월 9일까지 전국 12개 도시를 순회한다. 개성 뚜렷한 세 사람은 사랑, 여유, 우정을 주제로 자신의 히트곡뿐 아니라 다양한 팝송과 가요를 부를 예정이다.
그런데 패티 김, 이미자, 조영남. 겉모습만 봐선 위아래가 다소 헷갈린다. 알고 보니 뜻밖에 최고 연장자는 패티 김. 나이는 패티 김이 위지만 이미자와는 1959년 같은 해 데뷔, 올해로 가수 인생 46년을 맞는 가요계 입문 동기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래된 현역도 흔치 않을 정도.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이미자), ‘초우’ ‘못 잊어’(패티 김)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두 사람은 각각 전통적 감성과 도회적 감성을 대표하는 한국 가요사의 대스타다. 올해가 환갑인 조영남은 데뷔 37년을 맞는다.
‘빅 3 콘서트’ 제작발표회가 있던 날, 청일점 조영남은 “이렇게 거국적으로 제 환갑잔치가 열린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힘들고 어렵게 다시 뭉친 세 사람. 패티 김은 세 사람의 조우에 대해 “우리 세 사람의 각기 다른 개성을 뚜렷하게 나타내면서 함께 무대에 오를 때는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의 공연을 준비중”이라고 귀뜀했다.
예순다섯에 안아본 첫 손주
대형 가수 아닌 여자 패티 김은 따뜻한 여자
도도하다는 소문과 달리 직접 만난 패티 김은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따금 얼굴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10대 소녀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패티 김은 도도하다.
가수로서 무대에 설 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이런 도도함은 음악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문득 대형 가수가 아닌 두 딸의 어머니, 아내로서 그녀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패티 김은 딸들에게 친구 같은 엄마, 남편에게는 애인 같은 아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맏딸 정아씨는 유엔 홍보 직원. 오랜 기간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등 분쟁 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벌여 늘 어머니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던 큰딸은 3년 전 미국 워싱턴 DC로 근무지를 옮겼다.
둘째 딸 카밀라도 1집 활동을 접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 이탈리아에서 사업을 하던 남편 게디니는 현업에서 물러나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다. 온 가족이 뿔뿔이 떨어져 살다 보면 외롭기도 하겠다.
“요즘은 남편과 1년에 다섯 번 정도 볼까요? 각자의 생활을 즐기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요, 30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잖아요.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우리 인생도 좀 즐겨야죠. 그리고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 만나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아요. 이 나이에 다시 연애하는 기분이죠. 전에는 제가 공연차 집을 비울 땐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집에 있을 때는 여느 엄마, 아내 못지않게 착실한 주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요. 최선을 다해 가정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는 제 음악 생활에 더 욕심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요.”
가족 얘기를 이어가던 패티 김은 “올 초 식구가 하나 늘었다”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정아씨가 아들을 낳아 어머니 패티 김에게 손주를 안긴 것.
“딸이 너무 대견스럽고 또 기뻤어요. 손주 이름이 킴인데 얼마나 예쁜지 말도 못해요. 자주 못 보는 게 안타깝죠. 태어났을 때 보고 못 봤는데 5월에 다시 봐요. 워싱턴 DC에서 조영남씨와 함께 공연이 있거든요. 손주 볼 생각에 5월이 더욱 기다려지네요.”
조용히 인터뷰에 응하던 패티김은 “이 자리를 빌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일각에선 내가 외국에서 생활하다 공연이 있을 때만 한국을 찾는다는 얘기들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는 정말 사실과 다릅니다. 서울올림픽이 있던 지난 88년부터 저 한국에서 쭉 살았거든요. 카밀라 학교도 다 한국서 보냈구요. 제가 TV 출연도 뜸하고 공연도 간간이 해서 이 같은 소문이 나는 것 같은데요. 저 미국 영주권도 갖고 있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미국서 나고 자란 큰딸 정아가 혹 한국말을 잊을까 일부러 한국서 중학교를 다니게 한 패티 김이다. 그 노력 덕에 정아씨는 외국에 살면서도 한국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패티 김은 “연예인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10분이면 다 퍼지지만, 진위가 밝혀지는 데는 10년도 넘게 걸리는 것 같다”며 오해를 풀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성계와 연 맺은 지 어느덧 5년
후원회장 직 맡으며 가장 보람된 일은 ‘호주제 폐지’
패티 김은 회갑이 지난 나이에도 철저한 체력 관리로 젊은이들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매일 4~5km씩 걷기 운동을 하고, 틈날 때마다 수영을 즐긴다. 평생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절식을 하기로도 유명하다.
“건강 관리는 하루 이틀 해온 것이 아니에요. 평생 저 자신과 전쟁을 치러왔다고 할 수 있죠. 음식 조절하고 운동도 하루에 두 시간씩 꼬박꼬박 합니다. 가수 데뷔한 후로 배부르게 먹은 적이 별로 없어요. 항상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 정도만 먹어요.”
보톡스 주사라도 맞은 걸까? 몸매야 절식과 운동으로 조절이 가능하다지만 주름이 거의 없고 탄력 넘치는 피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톡스 주사가 뭐예요?(웃음) 전 피부 관리를 특별히 안 하는 편이에요. 좋은 피부를 타고났다 할까요? 피부에 관한 한 부모님께 감사해야 해요.”
패티 김은 체력 관리 못지않게 목소리 관리에도 신경을 쓴다. 공연 전에는 탄산음료를 비롯, 맵거나 짠 음식은 되도록 삼간다. 평상시 말을 아끼는 것 또한 목소리 관리의 일환이란다.
철두철미한 관리녀. 그녀는 어쩌면 스타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패티 김은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빅 3 콘서트’ 제작발표회 현장에서도 조영남은 세 사람 중 예전과 비교해 가장 많이 변한 사람으로 패티 김을 꼽으며 “굉장히 순해지셨다”고 말한 바 있다.
“예전엔 인상이 강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타고난 성격도 있었겠지만 스타 의식도 전혀 없었다곤 할 수 없죠. 스타는 항상 뭔가 베일에 싸인 존재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예인으로 활동하며 자기 관리 하난 정말 잘해왔다 자부했구요. 그런데 50이 넘으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양보하고, 겸손해지고, 또 부드러워졌죠.”
2001년 6월부터 패티 김은 여성단체연합 후원회장직을 맡고 있다. 여성단체 활동에 발벗고 나선 이후 뉴스를 볼 때도 호주제 폐지와 매매춘 문제가 나오면 한번 더 눈길이 가더라는 패티 김. 가수로서만 철저하게 자기 관리해온 그에게 여성단체 후원회장이란 이름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50대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맡아달라는 자리가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그런데 2001년 봄 여성단체연합에서 운영이 상당히 어렵다는 말과 함께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는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수락했는데 이렇게 보람이 클지 몰랐어요. 여성단체에서 오랫동안 노력하고 애써온 호주제 폐지도 성사됐잖아요? 제가 그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다는 생각을 하면 뿌듯해요.”
패티 김은 후원회장을 맡은 뒤 여러 차례 여성단체연합 후원금 마련을 위한 순회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상당한 액수의 수익금은 여성단체연합에 맡겼고, 운영에 큰 힘이 됐다. 그는 “무엇보다 내 공연을 통해 여성단체연합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혼에 이은 재혼, 아버지가 다른 두 딸을 키운 경험이 그로 하여금 특히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패티 김은 작곡가 고 길옥윤씨와 이혼 후 76년 이탈리아인 아르만도 게디니와 재혼해 둘째 딸 카밀라를 낳았다. 첫째 정아씨는 고 길옥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실 패티 김의 두 딸은 모두 외국 시민이기 때문에 호주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한국 국적을 가졌다면 두 딸의 성이 달라 자라나면서 엄청난 혼란을 겪었을 게 뻔하다. 그녀는 자기 개인적인 상황을 떠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호주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뒤늦게 여성계에 뛰어들었지만 그의 바람은 역시 ‘노래 잘하는 가수’로 남는 것이다. 그녀가 세운 또다른 인생 목표는 50주년 기념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는 것. 포부 역시 패티 김답게 당차고 또 도도하다.
“40주년 기념 공연도 무사히 치러냈으니 이제 50주년을 향해 달려가야죠. 그때가 되면 제 나이 일흔이에요. 하지만 자신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라도 무대에 설 수 없는 목소리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퇴할 겁니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지호영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