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리의 서태지' 박강성 성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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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4-04-29 14:20 조회101,6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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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강성. 그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미사리의 서태지\'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가수 박강성에 대해 진중하고 긴 이야기를 나눌 때가 분명히 오긴 왔다.
제도권 가수들, 아니면 새로 태어난 젊은 신인들에 대한 정보만이 매스컴에 넘쳐날 때 박강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제부터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놀랍겠지만 박강성이 실제로 터뜨려낸 감동의 현상들이다.
▶현상1
널리 알려진 히트곡도 제대로 없고, TV 활동도 활발하게 갖지 못했던 박강성. 하지만 지난 2003년 3월 서울 대학로 콘서트, 6월 부산 KBS홀 콘서트, 9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 콘서트에서 모조리 입장권을 매진시켰고, 급기야 2003년 12월27일 서울 코엑스에서 가진 연말 콘서트에서 입장권 1만2,000장도 완전 매진됐다.
▶현상2
2001년 30∼40대 여성들로 주축이 된 공식 팬클럽 \'박강성 매니아 클럽\'이 창단됐다. 이후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전주 인천 등 전국 주요 도시에 팬클럽 지부가 창설됐고, 현재도 아이들 가수에 못지않은 맹렬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많이 원망하고 살았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많이 슬펐다. 정말이지 죽지 못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20여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같은 이야기로 말문을 연 박강성의 가수 인생은 감동 자체였다.
▲박강성, 그 초라한 시작
박강성은 82년 MBC <신인가요제>에 나가 대상을 수상하며 가요계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4년이 흘러 86년 겨우 1집을 냈지만 방송활동조차 번듯하게 하지 못했다. 89년 난생처음으로 히트곡 \'장난감 병정\'을 내고 이름을 조금 알렸는가 싶었지만 다시 3·4집에서 연이은 실패를 맛봤다.
\"김범룡 최성수 임지훈과 동료다. 그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어렸던 그 시절 내 상처가 얼마나 컸겠는가?\"
박강성은 90년대 중반 집안에 불운까지 겹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라이브 클럽 등을 도는 이른바 \'업소 가수\' 생활을 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를 몇해….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를 것이다. 당시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업소 무대 가수라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고, TV에 나오는 가수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끝은 화려하다
하지만 그는 3년 전인 2001년부터 30∼40대 여성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이제는 \'중년층의 서태지\'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3년 전 서울 양재동에서 콘서트를 가졌는데, 1,200석짜리 5회 공연이었다. 총 6,000석의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참 많이 울었다. 알지 않나. 나는 히트곡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불황 탓으로 돌리며 번번이 깨지고(?) 있는 가요 관계자들 사이에는 \"왜지? 뭐 때문에 박강성 공연이 이렇게 난리가 난 것이지?\"라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인기라는 것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은 옛날의 실패가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 쉽게 인기를 얻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교만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
무엇이 해피엔딩을 만들어 낸 것일까.
\"6년 전부터 미사리 문화라는 것이 등장했다. 여기서부터 신화가 시작됐다. 때마침 결혼을 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면서, 그리고 미사리라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서 정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했다. 술집 무대를 부끄럽게 여겼던 모습도 자연히 바뀌고 다만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자세로 무대에 오르게 됐다.\"
대중은 분명 민감하다. 부끄럽게 느끼며 무대에 오르는 이와, 노래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무대에 오르는 이를 분명히 구분해낸다.
그렇게 박강성은 미사리에서 3년 동안 노래를 진솔하게 부르고 불러 비로소 2001년 양재동 공연에서 처음으로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98년 미사리 클럽에서 처음으로 확보했던 팬 한명을 시작으로 지금은 1만2,000석의 콘서트장을 가득 메우는 해당 연배 가수 중 최고로 잘나가는 가수가 된 셈.
\"처음에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콘서트에 오는 팬들에게 \'왜 저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했을 정도\"라고 고백하는 박강성은 \"사실 30∼40대의 문화적 욕구는 감춰져 있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들의 욕구와 그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이가 됐다\"고 말했다.
▲그 현장은?
박강성은 최근 감동의 라이브 공연을 실황으로 담고 있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다. 박강성과 비슷한 연배의 가수 중 \'라이브 앨범\'이라는 것을 내놓는 경우가 거의 없는 탓에 더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 라이브 앨범에는 박강성의 노래 외에 30∼40대의 열렬한 문화적 욕구를 짐작할 수 있는 박수소리, 탄성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강성의 오랜 질곡을 느낄 수 있는 노래 소리들, 그리고 그 노래 뒤로 들리는 30∼40대의 환호성은 분명 오늘날 가요계가 직면한 불황을 다시금 곱씹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미사리의 서태지\'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가수 박강성에 대해 진중하고 긴 이야기를 나눌 때가 분명히 오긴 왔다.
제도권 가수들, 아니면 새로 태어난 젊은 신인들에 대한 정보만이 매스컴에 넘쳐날 때 박강성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제부터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놀랍겠지만 박강성이 실제로 터뜨려낸 감동의 현상들이다.
▶현상1
널리 알려진 히트곡도 제대로 없고, TV 활동도 활발하게 갖지 못했던 박강성. 하지만 지난 2003년 3월 서울 대학로 콘서트, 6월 부산 KBS홀 콘서트, 9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 콘서트에서 모조리 입장권을 매진시켰고, 급기야 2003년 12월27일 서울 코엑스에서 가진 연말 콘서트에서 입장권 1만2,000장도 완전 매진됐다.
▶현상2
2001년 30∼40대 여성들로 주축이 된 공식 팬클럽 \'박강성 매니아 클럽\'이 창단됐다. 이후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전주 인천 등 전국 주요 도시에 팬클럽 지부가 창설됐고, 현재도 아이들 가수에 못지않은 맹렬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많이 원망하고 살았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많이 슬펐다. 정말이지 죽지 못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20여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같은 이야기로 말문을 연 박강성의 가수 인생은 감동 자체였다.
▲박강성, 그 초라한 시작
박강성은 82년 MBC <신인가요제>에 나가 대상을 수상하며 가요계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4년이 흘러 86년 겨우 1집을 냈지만 방송활동조차 번듯하게 하지 못했다. 89년 난생처음으로 히트곡 \'장난감 병정\'을 내고 이름을 조금 알렸는가 싶었지만 다시 3·4집에서 연이은 실패를 맛봤다.
\"김범룡 최성수 임지훈과 동료다. 그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어렸던 그 시절 내 상처가 얼마나 컸겠는가?\"
박강성은 90년대 중반 집안에 불운까지 겹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라이브 클럽 등을 도는 이른바 \'업소 가수\' 생활을 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를 몇해….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를 것이다. 당시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업소 무대 가수라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고, TV에 나오는 가수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끝은 화려하다
하지만 그는 3년 전인 2001년부터 30∼40대 여성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이제는 \'중년층의 서태지\'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3년 전 서울 양재동에서 콘서트를 가졌는데, 1,200석짜리 5회 공연이었다. 총 6,000석의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참 많이 울었다. 알지 않나. 나는 히트곡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불황 탓으로 돌리며 번번이 깨지고(?) 있는 가요 관계자들 사이에는 \"왜지? 뭐 때문에 박강성 공연이 이렇게 난리가 난 것이지?\"라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인기라는 것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은 옛날의 실패가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 쉽게 인기를 얻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교만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변화의 비결
무엇이 해피엔딩을 만들어 낸 것일까.
\"6년 전부터 미사리 문화라는 것이 등장했다. 여기서부터 신화가 시작됐다. 때마침 결혼을 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면서, 그리고 미사리라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서 정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했다. 술집 무대를 부끄럽게 여겼던 모습도 자연히 바뀌고 다만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자세로 무대에 오르게 됐다.\"
대중은 분명 민감하다. 부끄럽게 느끼며 무대에 오르는 이와, 노래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무대에 오르는 이를 분명히 구분해낸다.
그렇게 박강성은 미사리에서 3년 동안 노래를 진솔하게 부르고 불러 비로소 2001년 양재동 공연에서 처음으로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98년 미사리 클럽에서 처음으로 확보했던 팬 한명을 시작으로 지금은 1만2,000석의 콘서트장을 가득 메우는 해당 연배 가수 중 최고로 잘나가는 가수가 된 셈.
\"처음에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콘서트에 오는 팬들에게 \'왜 저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했을 정도\"라고 고백하는 박강성은 \"사실 30∼40대의 문화적 욕구는 감춰져 있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들의 욕구와 그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이가 됐다\"고 말했다.
▲그 현장은?
박강성은 최근 감동의 라이브 공연을 실황으로 담고 있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다. 박강성과 비슷한 연배의 가수 중 \'라이브 앨범\'이라는 것을 내놓는 경우가 거의 없는 탓에 더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 라이브 앨범에는 박강성의 노래 외에 30∼40대의 열렬한 문화적 욕구를 짐작할 수 있는 박수소리, 탄성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강성의 오랜 질곡을 느낄 수 있는 노래 소리들, 그리고 그 노래 뒤로 들리는 30∼40대의 환호성은 분명 오늘날 가요계가 직면한 불황을 다시금 곱씹어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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