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음악 최고의 작곡자 정의송 싱어로 또다른 변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8-04-30 18:44 조회151,427회 댓글0건
관련링크
본문
나의 노래 나의 인생
19세 되던 해 강원도 삼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그야말로 기타 하나메고 무작정 상경한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뒤돌아보면 가슴 아리도록 고달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음악만이 천직임을 알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습니다.
노래를 하고자 음악을 하였는데 그 꿈은 이루지 못하고운명인지 팔자인지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못다한 노래의 꿈이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하루한시도 노래에 대한 아쉬움이 뇌리를 떠난적이 없었습니다.
때를 기다려온 것일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이제 작곡가로써의 꿈은 어느정도 이루었고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에 임하려 합니다.
바로 저의 어릴적 꿈이였던 노래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음악인으로 사는것이 천직임으로 알고 먼후일 부끄럽지 않은 삶의 족적을 남기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 설령 잘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심중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든 분들에게 이제껏 제가 살아온,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또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들을 여기에 진솔하게 담아보고 싶습니다.
내세울만큼 대단한 인생을 살아온것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만큼은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아 저의 마음을 이 글에 담게 되었습니다.
1. 나의 유년시절
나는 강원도 삼척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의 집안은 가난했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형제가 8남 2녀여서 집안 살림살이가 아주 궁핍했었다. 아버지는 마땅히 직업이 없으셨고 어머니께서 고생고생 하시면서 가족의 살림을 꾸리셨다.
나의 어머니는 그 애환을 노래로 달래시곤 하셨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뽕짝”들을 아주 슬프고 구성지게 잘도 부르셨다. 나는 늘 어머니의 흥얼거리는 그 노랫소리를 들었고 자연스럽게 그 노래에 동화되어 저절로 따라부르곤 하였었다. 그때 나의 속안에 “뽕짝”의 감성이 베어들게 되었고 오늘날 트로트 작곡가로 살아갈수 있는 감성의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큰형이 사준 작은 아코디온에 매료되어 온종일 끌어안고 연주하였었다. 그 구슬픈 아코디온 소리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악기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아코디온이다. 나는 말수가 없는, 수줍움을 많이타는 소년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늘상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곤 하였었다. 그 성격이 지금도 남아 섬세하고 감성이 풍부해야만 성공할수 있는 가요 작가로써의 삶을 살아갈수 있게 해준것 같다.
\'
2. 나의 10대 시절
중학생시절 나의 집에 하숙을 하는 형이 있었다. 철도 공무원을 하는 형이였는데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늘상 기타를 치는 형이였다.
그 기타소리에 빠져서 매일 그 형의 방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황홀하였고 기타를 치는것이 나의 모든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큰형을 졸라 기타를 갖게되었다. 큰형은 나의 음악성을 알고 있었는지 늘상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고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였고 단지 음악이 좋았고 그 시간들이 즐겁기만 하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꿈은 문학가가 되는 것이였기에......
그렇게 중학교시절은 지나갔다.
고등학생이 되어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기를 준 사람을 접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바로 “조용필”이였다. 노래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이였고 전율이였다. 그때부터 나의 꿈은 오직 가수가 되는 것이였다.
조용필”이 나의 전부였고 나의 이상이였다. 나는 그날부터 그의 노래, 호흡, 발성. 모든 것을 똑같이 흉내를 내었다.
제2의 조용필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꿈은 원대하였고 그 누구도 나의 꿈을 꺾을수가 없었다.
무서운 아버지도 호랑이 선생님도.....
나는 책가방보다는 기타를 메고 등교를 하는 문제가 많은 학생으로 찍혀 선생님들께 많이 혼나고 야단맞고 두들겨 맞았지만 하루 한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참으로 고마운 담임선생님 덕분에 “정의송은 이런놈이야. 그러니까 냅두자”하고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나의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분이셨다.
공부는 뒷전이고 노래에만 빠져 사는 나였기에 늘상 아버지에게 혼이나기 일쑤였고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도 무서웠고 싫었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삼척시 시민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거기서 최우수상을 받고난 후부터야 아버지께서 나를 포기해 주셨고 그제서야 마음놓고 기타도 치고 노래연습도 할수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꿈은 애초에 포기하고 나의 머릿속에는 고등학교 졸업후에 서울로 올라가 가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 뿐이였다.
얼마나 가난했었던지 나는 졸업앨범을 받지 못했다.
졸업앨범을 찾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한동안 서울로 가지 못하였었다.
서울로 올라갈 차비가 없어서였다. 나는 매일 어머니를 졸라 그 당시 5만원을 손에 쥐고 기타하나 메고 완행열차로 서울, 지금의 청량리 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의 꿈은 너무나도 컸다.
반드시 가수로 성공해서 가난하게 사시는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다짐하고 서울에 왔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갈 곳이 없었다.
노래 할수 있는 업소를 찾아다녔지만 나에게 노래할 자리를 내어 주는 곳이 없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티 나는 어린 아이에게
어느 누가 노래를 시켜 주겠느냐마는...
아무리 찾아다니고 오디션을 보았지만 나에게 노래 일을 시켜주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나의 서울 입성은 시작되었다. 돈은 떨어지고 갈곳은 없고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지금의 성수동 뒷골목 이였다.
전봇대에 붙어있는 “공원구함”이란 포스터가 눈에 띄어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공장을 찾아가서 일을 달라고 하자 담당자가 “이곳은 노래하는 곳이 아니라면서 그냥 가라”고 하였다. 기타를 메고 있는 나의 행색이 못미더웠던 것이였다. 그냥 나가버릴까 고민했지만 갈곳이 없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그곳이였기에 사정사정해서 그곳에 취직할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공돌이”생활이 시작된것이였다.
나는 기술이 없어서 미싱사들이 재봉한 후에 실밥을 따는 일을 하게되었다. 일단 먹고 잘수있는 일이 해결되니까 마음은 행복하였다. 당시 월급으로 11만원을 받았는데 그월급의 절반은 음악을 위해 썼다.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노래공부를 하였다. 그러면서 당시에 음악다방이 성업을 하였는데 동대문에서 종로까지 모든 음악다방을 다니면서 무료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 돈을 받지 못했지만 노래를 할곳이 생겼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을 만큼 컸다. 열심히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었다.
공원생활 1년 6개월이 지나 마천동 “라이브”라는 업소에서 러브콜이 왔다. 월급도 주고 먹는것 자는것 다 해결해준다고 하여 공장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노래만 할수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곳에 갔지만 그곳역시 나에게 녹록하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질않아 월급도 못받고 그렇게 노래일을 하였다.
주방, 웨이터, 노래... 모든 것들을 혼자 해야만 하는 그런 곳이였다.
도망쳐 나오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갈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곳에서 안주하고 지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군에 입대 할때까지 지내게 되었다.
나의 서울 입성은 그렇게 초라하고 서러운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
3. 나의 20대 시절
군에 입대하라는 통지가 왔다. 사장이 그동안 수고했노라고 쥐어주는 5만원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서울에 올때도 5만원이였는데 고향에 갈때도 5만원인 내인생이 너무나도 슬프고 화가 났지만 어찌하랴. 눈물을 머금고 훗날을 기약하면서 군 시절을 보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곧바로 서울에 올라왔다.
역시 가수의 꿈을 안고서.....
또다시 서럽고 고달픈 무명가수의 삶이 시작되었다.
통기타 업소에서 스탠드빠에서 그리고 캬바레로 나의 노래인생은 그렇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가난한 무명가수로..... 그렇게.....
참으로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였다. 그래서 마침내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노래를 그만두는 것이였다. 아니 잠시 아주 잠시만 접어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죽어라 곡을 만들었다. 작곡가가 되기로 한것이였다.
이러다가는 내인생이 무명가수로 끝날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틈틈이 곡을 써왔던지라 작곡가가 되는것이 어쩌면 더 빨리 성공할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가 된 다음에 노래를 하자고 다짐하고 정말 열심히 노래를 지었다.
그 시절에 만들었던 많은 노래들이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요즘에도 하나둘씩 발표가 되어지고 있다.
다운타운가에서 포크와 팝을 불렀고 고급레스토랑과 라운지에서 샹송과 칸소네를 불렀다. 스탠드빠나 캬바레에서는 트로트를 불렀던 그때의 음악적 산 경험들이 나에게 다양한 장르의 곡을 만들게 해주는 원천이 되어 주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정말 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던 무렵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가수 “김혜연”을 만난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준 노래가 “서울대전대구부산”이였다. 내나이 29세에 작곡가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노래가 아닐수없다. 꿈만 같았다.
나의 이름으로 대 히트곡이 탄생되어진 순간이였다.
그 후로 “간큰남자” “서울평양반나절”등의 노래가 히트하게 되어 무명 작곡가에서 일약 히트 작곡가로 변신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4. 나의 30대 시절... 그리고 지금...
정말 열심히 살았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를 더 채찍질 하면서 작곡에 매달렸다.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보았다. 그래서 아파도 했고 쓰린 눈물도 흘렸다. 가난해서, 외로워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았던 그 모든 나의 이야기들을 노래로 풀어 내면서 아주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아주 많이.....
행운이 따라줘 역량있는 많은 가수들을 만나 히트곡도 많아졌다.
그 결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야말로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다. 저작권료로 받는 수입도 수십배로 늘어났고 생활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39세에 만나 결혼한 지혜롭고 아름다운 나의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고있다.
\'
나는 이제껏 작곡가로 살면서 노래를 만드는 일에만 진력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는 일도 노래를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일임을 깨닫고 많은 신인을 직접 발굴하여 그 아이들이 우리 가요계의 일원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앞으로도 재능있고 역량있는 아이들을 발굴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한다. 나또한 가수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그 아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수 있다. 그 아이들이 꿈을 이루어가는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가슴깊이 자리해 있는 설움 하나가 있다.
노래에 대한 미련, 못다이룬 그 꿈에 대한 갈증이 나를 목마르게 만든다. 늘...마음이 허전하고 아리다...
참으로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그리하여 이제 2년여에 걸쳐 준비한 음반을 세상에 내려고 한다.
나의 꿈을 이루기위해서..
노래를 하지 않으면 죽을 때 편히 눈감지 못할것 같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명예로운 작곡가의 삶을 살아가 주길 바라기도 하지만 그렇게는 못살것 같다.
어쩌면 가수가 되기 위하여 작곡가가 된것이 맞을것이다.
더 늦기 전에 노래를 시작 해야겠다. 더 세월이 가기 전에...
더 나이가 들어버리기 전에......
그렇다! 이제 그 꿈을 위하여 살아가고 싶다.
어릴적 꿈꾸었던 대망을 위하여....
2008년 봄 정의송
주요수상내역
2007년 올해의 작곡가상 수상
2007년 올해의 최고 인기가요상 수상
2007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작곡상 수상
2007년 문화부 장관상 수상
2006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6년 최고 인기 가요상
2005년 가수협회 감사패 수상
2005년 인기 작곡가상 수상
2004년 남인수 기념사업회 작곡가상 수상
2004년 문화부 장관상 수상
2003년 모범 작곡가상 수상
신곡 가사
못잊을 사랑 (정의송 작사/정의송 작곡)
나를 잊었나
벌써 잊었나
아직도 사랑은
가슴에 남아있는데
잊으려 지우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자꾸만 커가는 그리움
이토록 못잊을 사랑
왜 내가 보냈나
떠나지마 가지마 애원할껄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지마 가지마 매달릴껄
후회하는 바보
돌아와요 웃으며 와줘요
내게는 너 하나 뿐이야
작곡가 정 의송 의 작품 리스트
* 김혜연 : 서울대전대구부산, 간큰남자, 서울평양 반나절, 참아주세요(뱀이다)
* 송대관 : 사랑해서 미안해, 내여자, 새출발
* 장윤정 : 어부바, 첫사랑
* 정수라 : 우리둘이
* 소 명 : 빠이빠이야, 유쾌상쾌통쾌
* 박현빈 : 빠라빠빠
* 유지나 : 속깊은 여자
* 양지원 : 나의 아리랑
* 김용임 : 내사랑 그대여
* 한혜진 : 정말 진짜로
* 왕소연 : 그여자
* 류계영 : 인생
* 이명주 : 사랑이 가네
* 고영준 : 눈물 젖은빵
* 정의송 : 못잊을 사랑
* 김성민 : 사이다 같은 여자
* 김정수 : 그까이꺼
* 하나로 : 옥이
* 이지원 : 자꾸자꾸
* 김중배 : 헤이헤이헤이
* 최현숙 : 당신의 트로트
* 이세원 : 그게 나야
* 하명지 : 환상의 커플
* 동 후 : 화려한 인생
* 송 란 : 내사람
* 위금자 : 행복
* 김연숙 : 아직
* 임주리 : 사랑한 후에
* 김명성 : 죄와 벌
* 장 민 : 사랑합니다
* 변지훈 : 이남자를 믿어라
* 유일한 : 간다고야
* 이 숙 : 사랑의 도둑
* 가야랑 : 수리수리 마수리
* 한송희 : 열애중
* 유 진 : 손이 차가운 여자
* 한 빈 : 영차영차
* 태윤스 맘 : 태윤이에게
* 한 결 : 나이대로 가는 열차
* 뚜 띠 : 해버려
* 채수정 : 신미아리고개
* 손희주 : 바라기
* 이상화 : 삼류소설가
* 달 짜 : 사랑의 싸인
* 태 수 : 널위한 사랑
* 서지우 : 죽어야 사는 여자
* 도신영 : 떠날꺼야
* 세자매 : 함께
* 노유니 : 하는거 봐서
* 김가수 : 내가 왕가수
19세 되던 해 강원도 삼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그야말로 기타 하나메고 무작정 상경한지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뒤돌아보면 가슴 아리도록 고달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음악만이 천직임을 알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습니다.
노래를 하고자 음악을 하였는데 그 꿈은 이루지 못하고운명인지 팔자인지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못다한 노래의 꿈이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하루한시도 노래에 대한 아쉬움이 뇌리를 떠난적이 없었습니다.
때를 기다려온 것일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이제 작곡가로써의 꿈은 어느정도 이루었고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에 임하려 합니다.
바로 저의 어릴적 꿈이였던 노래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음악인으로 사는것이 천직임으로 알고 먼후일 부끄럽지 않은 삶의 족적을 남기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 설령 잘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심중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든 분들에게 이제껏 제가 살아온,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또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들을 여기에 진솔하게 담아보고 싶습니다.
내세울만큼 대단한 인생을 살아온것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만큼은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아 저의 마음을 이 글에 담게 되었습니다.
1. 나의 유년시절
나는 강원도 삼척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의 집안은 가난했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형제가 8남 2녀여서 집안 살림살이가 아주 궁핍했었다. 아버지는 마땅히 직업이 없으셨고 어머니께서 고생고생 하시면서 가족의 살림을 꾸리셨다.
나의 어머니는 그 애환을 노래로 달래시곤 하셨는데 흔히 이야기하는 “뽕짝”들을 아주 슬프고 구성지게 잘도 부르셨다. 나는 늘 어머니의 흥얼거리는 그 노랫소리를 들었고 자연스럽게 그 노래에 동화되어 저절로 따라부르곤 하였었다. 그때 나의 속안에 “뽕짝”의 감성이 베어들게 되었고 오늘날 트로트 작곡가로 살아갈수 있는 감성의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큰형이 사준 작은 아코디온에 매료되어 온종일 끌어안고 연주하였었다. 그 구슬픈 아코디온 소리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악기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아코디온이다. 나는 말수가 없는, 수줍움을 많이타는 소년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늘상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곤 하였었다. 그 성격이 지금도 남아 섬세하고 감성이 풍부해야만 성공할수 있는 가요 작가로써의 삶을 살아갈수 있게 해준것 같다.
\'
2. 나의 10대 시절
중학생시절 나의 집에 하숙을 하는 형이 있었다. 철도 공무원을 하는 형이였는데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늘상 기타를 치는 형이였다.
그 기타소리에 빠져서 매일 그 형의 방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황홀하였고 기타를 치는것이 나의 모든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큰형을 졸라 기타를 갖게되었다. 큰형은 나의 음악성을 알고 있었는지 늘상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고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였고 단지 음악이 좋았고 그 시간들이 즐겁기만 하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꿈은 문학가가 되는 것이였기에......
그렇게 중학교시절은 지나갔다.
고등학생이 되어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기를 준 사람을 접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바로 “조용필”이였다. 노래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이였고 전율이였다. 그때부터 나의 꿈은 오직 가수가 되는 것이였다.
조용필”이 나의 전부였고 나의 이상이였다. 나는 그날부터 그의 노래, 호흡, 발성. 모든 것을 똑같이 흉내를 내었다.
제2의 조용필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꿈은 원대하였고 그 누구도 나의 꿈을 꺾을수가 없었다.
무서운 아버지도 호랑이 선생님도.....
나는 책가방보다는 기타를 메고 등교를 하는 문제가 많은 학생으로 찍혀 선생님들께 많이 혼나고 야단맞고 두들겨 맞았지만 하루 한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참으로 고마운 담임선생님 덕분에 “정의송은 이런놈이야. 그러니까 냅두자”하고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나의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분이셨다.
공부는 뒷전이고 노래에만 빠져 사는 나였기에 늘상 아버지에게 혼이나기 일쑤였고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도 무서웠고 싫었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삼척시 시민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거기서 최우수상을 받고난 후부터야 아버지께서 나를 포기해 주셨고 그제서야 마음놓고 기타도 치고 노래연습도 할수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꿈은 애초에 포기하고 나의 머릿속에는 고등학교 졸업후에 서울로 올라가 가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 뿐이였다.
얼마나 가난했었던지 나는 졸업앨범을 받지 못했다.
졸업앨범을 찾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한동안 서울로 가지 못하였었다.
서울로 올라갈 차비가 없어서였다. 나는 매일 어머니를 졸라 그 당시 5만원을 손에 쥐고 기타하나 메고 완행열차로 서울, 지금의 청량리 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의 꿈은 너무나도 컸다.
반드시 가수로 성공해서 가난하게 사시는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다짐하고 서울에 왔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갈 곳이 없었다.
노래 할수 있는 업소를 찾아다녔지만 나에게 노래할 자리를 내어 주는 곳이 없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티 나는 어린 아이에게
어느 누가 노래를 시켜 주겠느냐마는...
아무리 찾아다니고 오디션을 보았지만 나에게 노래 일을 시켜주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나의 서울 입성은 시작되었다. 돈은 떨어지고 갈곳은 없고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지금의 성수동 뒷골목 이였다.
전봇대에 붙어있는 “공원구함”이란 포스터가 눈에 띄어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공장을 찾아가서 일을 달라고 하자 담당자가 “이곳은 노래하는 곳이 아니라면서 그냥 가라”고 하였다. 기타를 메고 있는 나의 행색이 못미더웠던 것이였다. 그냥 나가버릴까 고민했지만 갈곳이 없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가 그곳이였기에 사정사정해서 그곳에 취직할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공돌이”생활이 시작된것이였다.
나는 기술이 없어서 미싱사들이 재봉한 후에 실밥을 따는 일을 하게되었다. 일단 먹고 잘수있는 일이 해결되니까 마음은 행복하였다. 당시 월급으로 11만원을 받았는데 그월급의 절반은 음악을 위해 썼다.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노래공부를 하였다. 그러면서 당시에 음악다방이 성업을 하였는데 동대문에서 종로까지 모든 음악다방을 다니면서 무료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 돈을 받지 못했지만 노래를 할곳이 생겼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을 만큼 컸다. 열심히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었다.
공원생활 1년 6개월이 지나 마천동 “라이브”라는 업소에서 러브콜이 왔다. 월급도 주고 먹는것 자는것 다 해결해준다고 하여 공장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노래만 할수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그곳에 갔지만 그곳역시 나에게 녹록하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질않아 월급도 못받고 그렇게 노래일을 하였다.
주방, 웨이터, 노래... 모든 것들을 혼자 해야만 하는 그런 곳이였다.
도망쳐 나오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갈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곳에서 안주하고 지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군에 입대 할때까지 지내게 되었다.
나의 서울 입성은 그렇게 초라하고 서러운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
3. 나의 20대 시절
군에 입대하라는 통지가 왔다. 사장이 그동안 수고했노라고 쥐어주는 5만원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서울에 올때도 5만원이였는데 고향에 갈때도 5만원인 내인생이 너무나도 슬프고 화가 났지만 어찌하랴. 눈물을 머금고 훗날을 기약하면서 군 시절을 보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곧바로 서울에 올라왔다.
역시 가수의 꿈을 안고서.....
또다시 서럽고 고달픈 무명가수의 삶이 시작되었다.
통기타 업소에서 스탠드빠에서 그리고 캬바레로 나의 노래인생은 그렇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가난한 무명가수로..... 그렇게.....
참으로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였다. 그래서 마침내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노래를 그만두는 것이였다. 아니 잠시 아주 잠시만 접어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죽어라 곡을 만들었다. 작곡가가 되기로 한것이였다.
이러다가는 내인생이 무명가수로 끝날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틈틈이 곡을 써왔던지라 작곡가가 되는것이 어쩌면 더 빨리 성공할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가 된 다음에 노래를 하자고 다짐하고 정말 열심히 노래를 지었다.
그 시절에 만들었던 많은 노래들이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요즘에도 하나둘씩 발표가 되어지고 있다.
다운타운가에서 포크와 팝을 불렀고 고급레스토랑과 라운지에서 샹송과 칸소네를 불렀다. 스탠드빠나 캬바레에서는 트로트를 불렀던 그때의 음악적 산 경험들이 나에게 다양한 장르의 곡을 만들게 해주는 원천이 되어 주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정말 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던 무렵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가수 “김혜연”을 만난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준 노래가 “서울대전대구부산”이였다. 내나이 29세에 작곡가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노래가 아닐수없다. 꿈만 같았다.
나의 이름으로 대 히트곡이 탄생되어진 순간이였다.
그 후로 “간큰남자” “서울평양반나절”등의 노래가 히트하게 되어 무명 작곡가에서 일약 히트 작곡가로 변신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4. 나의 30대 시절... 그리고 지금...
정말 열심히 살았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를 더 채찍질 하면서 작곡에 매달렸다.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보았다. 그래서 아파도 했고 쓰린 눈물도 흘렸다. 가난해서, 외로워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았던 그 모든 나의 이야기들을 노래로 풀어 내면서 아주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아주 많이.....
행운이 따라줘 역량있는 많은 가수들을 만나 히트곡도 많아졌다.
그 결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야말로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다. 저작권료로 받는 수입도 수십배로 늘어났고 생활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39세에 만나 결혼한 지혜롭고 아름다운 나의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고있다.
\'
나는 이제껏 작곡가로 살면서 노래를 만드는 일에만 진력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는 일도 노래를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일임을 깨닫고 많은 신인을 직접 발굴하여 그 아이들이 우리 가요계의 일원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앞으로도 재능있고 역량있는 아이들을 발굴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한다. 나또한 가수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그 아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수 있다. 그 아이들이 꿈을 이루어가는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가슴깊이 자리해 있는 설움 하나가 있다.
노래에 대한 미련, 못다이룬 그 꿈에 대한 갈증이 나를 목마르게 만든다. 늘...마음이 허전하고 아리다...
참으로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그리하여 이제 2년여에 걸쳐 준비한 음반을 세상에 내려고 한다.
나의 꿈을 이루기위해서..
노래를 하지 않으면 죽을 때 편히 눈감지 못할것 같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명예로운 작곡가의 삶을 살아가 주길 바라기도 하지만 그렇게는 못살것 같다.
어쩌면 가수가 되기 위하여 작곡가가 된것이 맞을것이다.
더 늦기 전에 노래를 시작 해야겠다. 더 세월이 가기 전에...
더 나이가 들어버리기 전에......
그렇다! 이제 그 꿈을 위하여 살아가고 싶다.
어릴적 꿈꾸었던 대망을 위하여....
2008년 봄 정의송
주요수상내역
2007년 올해의 작곡가상 수상
2007년 올해의 최고 인기가요상 수상
2007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작곡상 수상
2007년 문화부 장관상 수상
2006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6년 최고 인기 가요상
2005년 가수협회 감사패 수상
2005년 인기 작곡가상 수상
2004년 남인수 기념사업회 작곡가상 수상
2004년 문화부 장관상 수상
2003년 모범 작곡가상 수상
신곡 가사
못잊을 사랑 (정의송 작사/정의송 작곡)
나를 잊었나
벌써 잊었나
아직도 사랑은
가슴에 남아있는데
잊으려 지우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자꾸만 커가는 그리움
이토록 못잊을 사랑
왜 내가 보냈나
떠나지마 가지마 애원할껄
붙잡지도 못하고
떠나지마 가지마 매달릴껄
후회하는 바보
돌아와요 웃으며 와줘요
내게는 너 하나 뿐이야
작곡가 정 의송 의 작품 리스트
* 김혜연 : 서울대전대구부산, 간큰남자, 서울평양 반나절, 참아주세요(뱀이다)
* 송대관 : 사랑해서 미안해, 내여자, 새출발
* 장윤정 : 어부바, 첫사랑
* 정수라 : 우리둘이
* 소 명 : 빠이빠이야, 유쾌상쾌통쾌
* 박현빈 : 빠라빠빠
* 유지나 : 속깊은 여자
* 양지원 : 나의 아리랑
* 김용임 : 내사랑 그대여
* 한혜진 : 정말 진짜로
* 왕소연 : 그여자
* 류계영 : 인생
* 이명주 : 사랑이 가네
* 고영준 : 눈물 젖은빵
* 정의송 : 못잊을 사랑
* 김성민 : 사이다 같은 여자
* 김정수 : 그까이꺼
* 하나로 : 옥이
* 이지원 : 자꾸자꾸
* 김중배 : 헤이헤이헤이
* 최현숙 : 당신의 트로트
* 이세원 : 그게 나야
* 하명지 : 환상의 커플
* 동 후 : 화려한 인생
* 송 란 : 내사람
* 위금자 : 행복
* 김연숙 : 아직
* 임주리 : 사랑한 후에
* 김명성 : 죄와 벌
* 장 민 : 사랑합니다
* 변지훈 : 이남자를 믿어라
* 유일한 : 간다고야
* 이 숙 : 사랑의 도둑
* 가야랑 : 수리수리 마수리
* 한송희 : 열애중
* 유 진 : 손이 차가운 여자
* 한 빈 : 영차영차
* 태윤스 맘 : 태윤이에게
* 한 결 : 나이대로 가는 열차
* 뚜 띠 : 해버려
* 채수정 : 신미아리고개
* 손희주 : 바라기
* 이상화 : 삼류소설가
* 달 짜 : 사랑의 싸인
* 태 수 : 널위한 사랑
* 서지우 : 죽어야 사는 여자
* 도신영 : 떠날꺼야
* 세자매 : 함께
* 노유니 : 하는거 봐서
* 김가수 : 내가 왕가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